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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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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부집단군 ====== [[파일:275d4ba5-76bf-4e6f-9ec2-5fc2fe8f33e3.jpg]] ▲ 1941년, 벨라루스 고멜 지역에서 민간 가옥을 파괴하는 중부집단군 병사들. > "한 마을에서 고의적인 파괴 및 방해 행위가 발생했다면, 해당 마을에 사는 유대인 전체를 몰살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사태를 일으킨 이들, 아니 적어도 그들의 배후 세력만큼은 확실히 척결할 수 있다." > ---- > - 독일 육군 구스타프 폰 마우헨하임 게난트 베흐톨샤임 소장이 밝힌 대파르티잔 작전 방침. 베흐톨샤임 소장은 1941년에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에 소속된 제707보병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그는 707사단 외에도 질서경찰 부대 및 리투아니아인 보조부대까지 거느렸으며, 1943년까지 벨라루스의 대파르티잔 작전을 수행하면서 대량 학살과 파괴 행위를 자행했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 421p에서 발췌. 중부집단군의 경우, 작전 시작 이후 얼마간은 파괴 행위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티머시 스나이더에 따르면 이는 역사적으로 딱히 정치적 실체를 가져본 적 없던 벨라루스의 특성 상, 독일이 이용할 만한 현지 정치권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르투어 네베]]가 이끌던 해당 지역의 특무대 B는 자신들의 학살에 조력할 협력자들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현지 협력자들의 빈자리를 중부집단군 부대들과 친위대 및 질서경찰들로 채워넣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 중에서도 프리퍄티 습지는 독일 점령 지역 중 가장 파괴 행위가 심각한 지역으로 탈바꿈한다. [[페도어 폰 보크]][* 아이러니하게 소련에 의한 카틴 학살을 밝혀낸 장본인이다...], [[귄터 폰 클루게]]와 [[에른스트 부슈]], [[발터 모델]]과 같은 중부집단군 사령관들은 벨라루스 파르티잔 토벌전을 제지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부집단군은 반 히틀러 성향이 가장 강한 부대로, 나치즘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훗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히틀러 암살 시도]]에 중핵을 맡는 이들이 다수 분포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모델이나 클루게같은 인물들은 히틀러에게조차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 또한 파르티잔 토벌전에 있어서는 질서경찰과 친위대의 학살을 방조하거나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가령 1941년 9월 24일에 중부집단군 사령부에서 열린 모길료프[* 현 벨라루스 [[마힐료우]]. 당시 중부집단군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다.] 회의에서, 중부집단군 후방지역 사령관 막스 폰 솅켄도르프 대장은 휘하 사단장들과 함께 친위대원들의 '학살 특강'을 들었다. 당시 참석한 친위대 측 인원은 특무대 B의 [[아르투어 네베]], [[하인리히 힘러]]의 대리인 자격으로 참여한 벨라루스 지역 고위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그리고 무장친위대 기병여단[* 무장친위대 8사단 "플로리안 가이어"의 전신.] 사령관 [[헤르만 페겔라인]] 등이었다. 그들은 국방군 장교들에게 유대인 및 파르티잔 학살의 필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그 방식에 대해서도 강의했고, 시범까지 보여 주었다. 다음 날 인근의 크냐지치(Княжицы) 마을로 이동한 그들은 질서경찰 322대대가 실제로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색출하는 모습을 참관했다. 해당 마을에서는 거수자나 파르티잔 가담 여부가 의심되는 사람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으나, 그들은 32명의 민간인들을 처형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자였다. 이후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은 적극적으로 학살에 가담한다. 1942년 3월 26일부터 동년 4월 6일까지 이어진 밤베르크 작전(Unternehmen Bamberg)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다. 당시 중부집단군 후방지역의 제707보병사단은 슬로바키아군, 그리고 질서경찰 제315전투대대와 함께 파르티잔 진압 작전을 개시하여 약 4400명 가량의 '[[파르티잔]]'을 제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확인된 사망자만 4396명이며 학계에서는 실종자 등 집계에 잡히지 않은 경우까지 감안하면 희생자가 6000명 이상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막상 수거한 무기는 47정의 소화기 뿐이었고, 독일군은 다 합쳐서 7명의 인명피해밖에 입지 않았다. 이는 매우 비정상적인 수치로, 이는 그들이 살해한 4400명의 '파르티잔' 중 절대 다수가 실제로는 비무장 상태인 민간인이었음을 의미한다. 1943년 3월에 있었던 들소 작전(Unternehmen Büffel) 역시 마찬가지였다. [[르제프 전투]]의 일부였던 해당 작전을 통해, [[발터 모델]]의 제9군 30만 명은 소련군의 포위를 떨쳐내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탈출을 위한 퇴각로 정리 과정에서 그들은 약 3000명 가량의 '파르티잔'들을 사살하였는데, 막상 수거한 무기는 277정의 소총과 41정의 권총, 61정의 기관총 등 극히 소수였다. 역시 이는 9군이 살해한 이들 중 절대 다수가 실제로는 비무장 민간인이었음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모델은 노동 적령기의 남성과 식량을 차출하고, 우물에 독을 풀고, 마을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Вели́кая война́ (2013)] 르제프를 탈환한 소련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역에 있던 대다수의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뱌지마: 5500채의 건물들 중 51채, 그차즈크: 1600채 중 300채, 르제프: 5400채 중 500채 생존.] 이 세 도시에서만 15000명이 강제 노동을 위해 독일로 수송되었다.[* 《Hitler's Commander: Field Marshal Walther Model》 스티븐 H. 뉴튼] 철도 거점과 1,000km에 달하는 철로, 전주와 1,300km의 전화선과 전선이 파괴되었다. 소련은 발터 모델을 전범으로 선포하고 법정에 세울 생각이 만반이었으나, 모델이 항복하지 않고 자살하면서 무산된다. 이는 민간인 피해를 고려하지 않는 전형적인 나치 독일식 빨치산 토벌전이었다. 이러한 진압 작전들은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벨라루스가 해방될 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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